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우옌 왕조 (문단 편집) == 행정 == ||[[파일:nguyen-dynasty-jptraveltime.jpg|height=300]]||[[파일:odgvk4w9oxr01.jpg|height=300]]|| 응우옌 왕조의 행정체계는 [[중국]]의 그것과 굉장히 유사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황제 아래에 [[육조|6부]]가 있었고, 황제를 보좌하는 4명의 내각대학사들이 존재했다. 다만 육부가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로 이루어져 있었던 [[청나라]]와는 약간 구성이 달랐다.[* 조선은 '~부'만 '~조'로 달랐을 뿐 사실상 같았다.] 이부, 호부, 예부, 형부, 공부는 동일했으나, 독특하게도 병부가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에 국가의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Học Bộ: 學部)가 있었다[* 기존의 6부제하에서 교육은 예부 담당이다.]. 각 부마다 1명의 상서(Thượng thư: 尙書)를 두어 총괄하게 하고 그 아래에 2명의 참지(Tham tri: 參知)들을 두어 보조하게 한 것은 중국과 동일했다. 또한 6부 위에 [[의정부]]가 존재했던 조선과는 달리, 베트남에는 기밀원(Cơ Mật Viện: 機密院)이라고 해서 황제 직속의 최고위 권력기구가 따로 있었다. 기밀원은 황제가 친히 임명하는 4명의 내각대학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후에 황궁]]에 집무실을 두고 국가대소사에 전부 관여할 정도로 그 권한이 매우 강력했다. 이같은 상징성이 있었기에 기밀원은 베트남의 최고 의결기구라는 권위가 있었고, 때문에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배할 때에 일부러 프랑스의 안남 총독을 이 기밀원에 의무적으로 참석시킬 정도였다. 왕조를 건국한 자롱 황제는 베트남을 크게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로 나눈 다음, 황제는 오직 수도인 [[후에]]가 있는 중부 지역만을 직접 통치하고 북부와 남부에는 총독을 한 명씩 임명하여 속해있는 여러 개의 보호령들을 대신 통치하도록 하는 일종의 지방분권형 정책을 펼쳤다. 당시 베트남 북부의 총독은 [[하노이]]에, 남부의 총독은 [[사이공]]에 총독부를 두고 업무를 보았다. 황제는 오직 수도 후에 주변에 있는 4개의 현만을 직접 다스렸고, 추가적으로 지방의 군사적 요충지나 중요한 거점이라고 여겨지는 7개의 중앙 보호령을 따로 다스리도록 만들었다. 총독들은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6개의 보호령들을 다스렸고, 때문에 베트남의 황제들은 동시대의 [[조선]]의 왕들보다 훨씬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영토의 범위가 좁은 편이었다. 이같은 지방분권형 정책은 [[민망 황제]] 시기에 끝난다. 자롱 황제 사후 제위에 오른 민망 황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도를 추진했고, 총독제가 황권 강화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폐지해버린 것이다. 민망 황제는 전 국토를 중국식으로 31개의 성(省)들로 나누었고, 각 성들을 또 군과 현들로 나누어 황제가 직접 지방관들을 파견하도록 만들었다. 가장 작은 행정단위는 하나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 향이었다. 군이나 현까지는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들을 파견한 것과 달리, 향의 경우에는 보통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있거나 신망있는 사람에게 향리직을 맡겼다. 1840년 경 한창 응우옌 왕조가 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때에 베트남에는 72개의 현과 39개의 부현, 283개의 구가 있었으며, 각각의 구들에는 최소 3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했다. 1834년부터 1845년 사이에는 [[캄보디아]]가 일시적으로 베트남에 병합되어 쩐떠이 성(Trấn Tây thành, 鎭西城)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물론 민망 황제가 죽은 직후 반란이 일어나서 떨어져나간 바람에 얼마 가지는 못했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